스크랜턴 선교사님 이야기 (2009년 글)

By | 11/05/2018

** 아래의 글은 예멜합창단에서 스크랜턴 선교사님 서거 100주기 기념음악회때 낭독하기 위하여 만든 스크랜턴 선교사님 이야기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 : 24)

메리 스크랜턴(시란돈)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여사는 이화학당을 통해 한국 근대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외아들을 의대에 보냈습니다. 그녀는 1884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로부너 52세 때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의사인 아들 윌리암 스크랜턴은 의료 선교사로 임명받아 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에 왔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 조차 없었던 ‘남녀 평등의 시대가 우리의 미래를 열어간다’는 원대한 꿈과 하나님이 주신 한국 여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품고 이땅에 와 ‘배우고 깨우치는 것만이 잘 사는 길’이라며 가난하고 천대받는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1886년 그는 자신의 집에 버려진 아이들, 첩의 아이들을 데려와 씻겨주고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점차 학생 수가 늘어나 1887년 고종황제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해 훌륭한 한국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1891년 이화학당장 자리를 로드 와일러에게 물려주고 직접 여성들을 전도하는 일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한국 여성이 한국 여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며 전도부인들을 양성하여 그들과 함께 전국에 복음을 전파하고 위생생활 개선에 힘썼으며 아들과 함께 1885년 정동에 ‘시병원’을 열어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습니다. 1887년 치료받지 못하는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보구여관’이라는 의료시설과 여성 문맹 퇴치를 위해 ‘매일학교’를 열었습니다.

‘서울 사대문 밖에 나가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음식과 의료 혜택을 주고 싶다.’며 남대문 밖 상동과 서대문 밖 애오개, 동대문에 진료소인 시약소를 세워 그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이곳들은 나중에 항일 운동의 본산지인 상동교회, 아현감리교회, 동대문교회가 되었고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쓴 보고서를 보면 이 할머니 선교사의 사랑과 열정은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열 사람의 선교사가 있었다면 몇 가지 일에만 집중했을 것이고 훨씬 일을 잘 해냈을 것’이라고 토로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한국인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식을 줄 모르고 24년 동안 한결같이 점점 더 뜨거워져 조선 여성의 입장에서 조선 여성의 교육과 복지, 영혼 구원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헌신하시다가 1909년, 76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양화진에 안장되셨습니다.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자신의 작은 집을 열어 갈 곳 없는 한 여학생을 돌보며 기도로 시작한 이화는 이제 123세가 되었고, 스크랜턴의 정신을 이어받은 수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화에서 자란 무수한 이화인들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에서, 또 먼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약한 이들에게 힘이 되며 어둠에 빛이 되는 메리 스크랜턴의 삶을 이어가며 자유와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 12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