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길재 박사님은 한국이 일본에 합방된 바로 다음 해인 1911년 2월 18일에 경기도 안양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서울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개성 호수돈고녀에 입학했을 때 집안에서 자신을 시집 보내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1924년에 집을 나와 정동교회 김종우 감리사의 보호를 받으며 이화여고를 다녔는데, 개성에 있던 미국인 클라라 하워드 선교사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아 무난히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 해 이화여고 졸업 때에 박사님에 대한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렸던 것이 계기가 되어 어머님의 방문을 받고, 이 후로는 강제로 혼인을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아래 1929년에 이화전문 문과에 진학하시고 1933년에 졸업하셨습니다.
이화전문에서 공부하는 동안, 1931년 10월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학감을 지내시던 김활란 박사님을 존경하며 많은 영향을 받기 시작하셨습니다. 1934년에는 황해도 백천에서 10개월 동안 교회 뒷방에 거처하면서 농촌 계몽운동을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여자의 몸이지만 인류를 위해 무언가 해 봐야겠다는 큰 포부를 안고, 1935년에 일본에 건너가 동경제국여자의학전문학교에 진학 1941년에 졸업하고, 그 해 가을에 귀국하여 지금의 서울대학부속병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의대부속병원 산부인과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하면서 학위논문을 준비하여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의학박사 학위를 획득하셨습니다.
해방 후 1945년 9월부터 3년 반 동안, 김활란 총장님의 특청으로 박사님은 이화여대 부속 동대문병원의 산부인과 교수 겸 과장으로 봉직하셨습니다. 1949년 4월에 첫 번 미국무성 초청으로 선발 된 10명의 의사들 중 유일한 여성으로 참가하여 도미하게 되셨고, 6개월 동안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연수하셨습니다. 1950년에 뉴욕으로 오셔서 Brooklyn에 있는 St. Catherine’s Hospital에서 5년 동안 intern과 resident를 마치고, Johns Hopkins University Hospital의 fellow, 1958-60년까지는 New York Medical College에서 공부하셨습니다. 그리고 1960년에 동양의 의과대학 출신으로 처음으로 뉴욕 주에서 의사자격증을 획득하시고, 그 해에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의 개업의가 되셔서 1986년에 은퇴하실 때까지 열심히 인술을 베푸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생애를 통해 임 박사님의 또 하나의 직업은 심혼을 기울여 이화대학을 사랑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큰 은사님이신 김활란 선생님의 뜻을 생각하시며, 지금도 선생님이 엄연히 생존해 계신 양 마음 속 깊이 모시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께 지혜와 인도를 구하며 살아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1966년부터 70년까지는 김활란 박사님을 도와 이화10년발전계획 뉴욕지부 책임자로, 1967년에서 69년까지는 Ewha Cooperating Board of North America 이사로, 1970년에는 이화대학 국제재단의 창립이사로, 1981년부터 2001년까지는 국제재단 Vice-president로 수고하셨습니다. 뉴욕에서 이화대학 동창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시면서, 1964년 뉴욕에 이화대학 동창회가 조직되었을 때 초대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임길재박사님은 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시며 절약을 많이 하시지만, 큰 뜻이 있는 데에는 누구보다도 크게 베푸셔서 큰 감동을 주십니다. 1971년에 새로 창립된 이화대학 국제재단의 사무실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선뜻 1 만 불을 내 놓으셔서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40년 전, 현금 만 불은 큰 액수였습니다. 또, 뉴욕에서 제일 오래된 뉴욕한인교회 건축을 위해 30 여 년 전에 13 만 불에 해당하는 집을 헌납하신 일도 있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임박사님의 덕행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면입니다.
이화대학은 1976년 창립 90주년 기념식에서 임박사님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고, 1997년에는 “자랑스러운 이화인”으로 선정했습니다.
글/ 이정화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