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스랑’의 꿈

By | 11/09/2018

총동창회장 장명수

지난 10월 21일 프놈펜 근교 캄퐁스프에 있는 스랑 마을에서 ‘이화 스랑’ 초등학교 개교식이 열렸다. 첫 학생은 유치반 17명, 초등학교 1학년 33명이었다. 입학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의젓한 태도로 축하객들을 맞았다.

이 학교의 설립을 추진해 온 아시아 교육봉사회(VESA) 회원들과 이화여대 부속초등학교 동창들은 개교식에서 크고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이 학생들이 훌륭하게 자라서 캄보디아를 발전시킬 일꾼이 될 것이라는 꿈, 이 학교가 백년 천년 풍성한 열매를 맺는 거목이 되어 교육의 위대함을 증언할 것이라는 벅찬 꿈이었다.

캄보디아에 설립한 초등학교

그들이 어려운 나라에 학교를 세우기로 뜻을 모은 것은 메리 F. 스크랜튼 부인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미국 감리교 여성선교국이 파견한 선교사로 한국에 온 스크랜튼 부인은 1886년 5월에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고, 1909년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육과 선교에 일생을 바쳤다. 아시아 교육봉사회는 스크랜튼 부인이 그랬듯이 어려운 나라에 교육과 선교의 밀알을 심고자 했다.

동남아에서 대상을 찾던 그들은 캄보디아를 선택했다. 그 나라가 겪어 온 모진 시련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앙코르왕국의 찬란한 전통을 가진 캄보디아는 외침에 시달리다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독립 후에는 정치 불안이 계속되었으며, 1975년 공산혁명으로 집권한 크메르 루즈 정권 아래서 인구의 25%가 학살과 기근으로 희생되는 참극을 겪었다. 1989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여 국가 재건에 나섰으나 1인당 국민소득 500달러, 문맹률 35%, 고교 졸업 인구가 5%로 미만인 저개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 캄보디아에 가서 거리를 떠도는 가난한 아이들을 보았을 때 눈물이 쏟아졌다. 6.25전쟁 당시 바로 우리들의 모습 같았다. 수백만을 학살한 킬링 필드의 참상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경험한 우리에게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아시아 교육봉사회를 만들고 이끌어 온 이화여대의 전,현직 교수들인 이은화, 강순자(현 이화여고 교장), 전길자씨는 이렇게 말했다.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이대 약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캄보디아에 선교사로 갔던 김길현씨가 현지에서 학교부지를 물색했다. 그들은 프놈펜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인 스랑 마을에 25만 평의 학교부지를 마련했고, 초등학교부터 중,고교 대학에 이르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대 부속 초등학교 동창들은 ‘우리가 받았던 좋은 초등교육을 어려운 나라의 어린이들도 받게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참여하여 현재 약 3억여원을 모금했다.이대 부속초등학교는 현지의 교사 5명을 초청하여 교사연수를 받게 했고, 6학년 학생들에게 ‘이화 스랑’방문 프로그램을 통해 ‘지구촌 한가족’의 자각을 키워줄 계획도 세우고 있다.

지난 10월 8일은 스크랜튼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123년 전 스크랜튼 부인이 이화학당에 심었던 한 알의 밀알이 캄보디아의 스랑 마을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교육이 열매를 맺고 그 씨앗을 널리 퍼뜨리기까지 한 세기가 걸렸구나’ 라는 감동을 준다.

100년 만에 잇는 ‘스크랜튼의 꿈’

‘이화 스랑’은 1차로 교실 3개를 건축했고, 내년 2월까지 3개를 더 건축할 계획이다. 또 연차적으로 중,고교와 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데, 대학 설립은 기독 교수협의회가 지원하고 있다. 특히 대학은 캄보디아의 재건을 이끌 수 있는 우수한 인재들을 키워내도록 국제적인 수준을 갖추고 의대와 병원, 과학기술 연구소와 국가개발 연구원 등을 설립해 나갈 예정이다.

그들의 원대한 꿈은 ‘이화 스랑’과 함께 걸음마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들어간 돈은 20억원 정도인데 앞으로 더 큰 돈을 모금해야 한다. 그들이 지치지 않는 것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힘은 교육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스크랜튼의 꿈을 ‘이화 스랑’의 꿈으로 이어지게 한 교육의 힘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