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서 후진양성 약속 못지켜 내내 죄책감”
입력일자: 2011-05-19 (목)
한국전쟁으로 귀국계획 수정
동양인.여의사 차별 딛고 뉴욕서 개업
30여년전 퇴근길에 넘어져 대퇴부를 크게 다친 이후 완쾌되지 않은 탓에 이날 그는 휠체어에 의지해 잔치에 참석했고 후배들이 준비한 생일 케이크를 자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금년으로 61년째를 맞은 그의 뉴욕생활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 분야들로 집약된다. 산부인과 전문의, 정신적 안식처였던 뉴욕한인교회, 그리고 자신이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모교 이화동창회 등과 인연을 맺고 살아온 결과로 이날 참석자들 대부분이 교인, 후배, 그리고 지인 등이었다.
임박사의 뉴욕생활은 1949년 브루클린의 세인트 케더린스 병원으로부터 시작됐다.
일본(동경여전)과 한국(경성제대)에서 이미 마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정부 주선으로 미국에서 다시 밟고 있던 중 6.25 전쟁 소식을 들었다. 몇 달 만에 피난지로 부터 전해 온 집 소식은 귀국할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었다. 의대로 유명한 존스 합킨스 대학에서 선진의학을 배우고 돌아가 모교인 이화에서 후진들을 양성하겠다던 당초의 계획은 여기서 수정됐다.
당시 뉴욕은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윤응팔 목사가 시무하던 뉴욕한인교회에 이화 선배 김상순 사모가 있어 위로가 되었고 이듬해 도미한 후배 성악가 김자경 부부가 맨하탄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둥지를 마련해 주말에는 김치 등 한국음식을 대접받던 추억도 있었다. 1950년부터 5년간 계속된 인턴 레지던트는 무척 힘든 과정이었다. 당시 산부인과는 응급환자가 있을 경우 의사들이 앰뷸런스를 타고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태아를 받아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루저녁 다섯 차례나 앰뷸런스를 타다 보니 동이 훤히 트던 경험도 했다. 상하관계가 엄격했던 병원 시스템으로 고생이 많았고 특히 동양인, 여의사라는 신분 때문에 보이지 않는 차별대우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대 병원, 이대병원 시절의 풍부한 임상경험으로 자궁외 임신이나 자궁암 환자들을 쉽게 알아내는 두각을 발휘해 전문의들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그 정도 실력이면 개업해도 충분하다는 주위의 평을 들었다.
당시 뉴욕 주에는 2차대전 이후 외국 출신에게 의사면허 시험 자격을 준 일이 없었다. 주 당국에 신청을 했더니 타주로 가보라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동양계라는 이유로 시험 자격마저 주지않는 차별에 맞서 변호사를 통해 당국에 정식으로 청원서를 제출했다. “뉴욕에서 7년간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고 뉴욕에서 개업하고 싶다. 예외규정이라도 적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기각될 경우 당당히 싸우겠다는 의지를 굳히던 1958년 어느 날 응답이 왔다. 우선 서류심사와 인터뷰부터 하겠다는 통보였다. 15명의 심사위원들로 부터 엄격한 심사를 받은 후 시험 칠 자격을 얻었다. 미국 학교를 다니는 게 좋겠다는 단서가 붙었으므로 따르기로 했다. 다운타운 메디칼센터, 뉴욕 메디칼 칼리지, 폴리 클리닉 메디칼 스쿨 등을 다니며 의화학, 해부병리, 미생물 등 기초의학을 충실히 다졌다.
그가 공부했던 일본 동경제국 여의전과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의대 부속병원 인턴, 이화여대 부속 동대문병원 산부인과 교수겸 과장 경력 등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자격이야 충분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기초의학 분야가 다소 미흡했던 부분을 뉴욕에서 만회할 수 있었다. 이듬해 시험에서 낙방한 경험을 토대로 분발해 1960년 시험에선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간 병원을 통해 영주권도 취득했고 의사 면허를 따는 등 신분상승을 통해 봉급이 월
240달러에서 600달러로 크게 올랐다. 자격은 갖췄지만 개업을 하는 데는 리스크가 따랐다. 개업자금과 미국내 경험, 환자 확보 등에 자신을 기르느라 1964년에야 비로소 개업할 수 있었다. 그간 일만 하면서 저축했던 얼마간의 돈과 약제사인 구라치아노 부인의 무담보 개인융자 5,000 달러로 퀸즈 자메이카 175가에 유대인 외과의사 베어 등과 합동으로 개업했다.
처음에는 일본계 환자들이 찾아왔다. 일본 총영사 부인을 치료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지옥에서 천사를 만났다’는 내용의 기사가 일본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이듬해 주차장이 넓고 교통이 좋은 175가 88 애비뉴 사무실로 독립했다. 워낙 성실하게 환자들을 돌본다는 소문이 나자 미국인 환자들도 늘고 하루 25명의 환자가 몰리는 날도 있었다. 70년대 들어 한인 환자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임박사는 임상치료 외에 환자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치료인 마우스 테라피를 중시했고 낙심한 환자들에게는 종교적인 설교도 했다. 때론 부부싸움도 조정했고 갖가지 카운슬링을 통해 환자들과 가까워졌다. 그의 22년에 걸친 개업의 시절은 다행스럽게도 큰 과오 없이 운영이 잘 되었다.
임박사에게는 시인 모윤숙 등 친구가 있었고 김활란과 같은 좋은 선배도 있었다. 일본유학도 실은 김활란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이고 동대문 병원도 김활란과의 뜻이 맞아 결실을 보았던 것인데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더 하고 돌아가 이화에서 후진들을 양성하려던 약속을 자신이 깼으므로 늘 김활란과 모교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는 부담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빚을 다소나마 갚을 수 있는 길이 생겼다. 1966년 이대 총장직을 사임한 김활란이 뉴욕에 와서 이화 발전 10개년 계획을 세운 일이 있었다. 결국은 이화 국제재단이 설립되는 단계로 확대되었는데 이때 1만달러를 쾌척했다. 평소 이화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그런 방식으로라도 표시해야 했던 것. 이화만큼이나 임박사가 관심을 쏟은 곳은 인턴 시절부터 그의 신앙의 중심이었던 뉴욕한인교회였다. 교회 증축기금으로 13만달러를 기부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임박사는 플러싱의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그를 돌볼 마땅한 직계가족도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늘 깔끔하고 자존심 강한 그에게 프로포즈 했던 남성들이 있었지만 독신을 고집한 것도 따지고 보면 김활란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언젠가 필자에게 그이라면 결혼을 할 수도 있었다고 귀띔 했던 인물이 있었다. 한국의 어느 대학 총장을 지낸 그의 이름은 임박사와의 무언의 약속이므로 지키기로 한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